특집기사

[하느님의 종 124위 열전]<2>주문모 신부

[하느님의 종 124위 열전]<2>주문모 신부
 
조선교회 초석 다진 외국인 사제
 
 

 삶의 여정
 지난 7일 시복이 결정된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외국인이자 사제, 선교사는 단 1명밖에 없다. 124위 중 유일한 외국인 선교사제, 중국 출신의 주문모 신부는 조선교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고 결정적이었다. 1786년 가을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시도하다가 독성죄가 된다는 걸 깨닫고 2년 만에 중단할 만큼 보편교회 교계제도에 대해 무지했던 조선에 입국한 첫 사제로서 주 신부는 조선 교회가 '교회다운' 기틀을 잡는 데 빛나는 공로를 세웠다. 1794년 12월 24일 조선에 입국, 1801년 5월 3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기까지 주 신부는 6년 5개월여 동안 조선교회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제였다. 1795년 4월 5일 예수부활대축일에 조선교회 첫 미사를 집전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경기와 충청, 전라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사목했다. 특히 조선에 '회장제'를 도입해 최창현(요한, 1759~1801)을 총회장에, 강완숙(골룸바, 1761~1801)을 여성회장에 임명하는 등 조선교회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한 장기적 사목 방안을 마련했다.
 
 또한 선교사로서도 탁월한 면모를 보인 주 신부는 1797년께 베이징에 있던 비밀결사단체를 본따 교리교육과 전교를 목적으로 한 명도회를 설립한다. 회장에는 한국교회 첫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의 집필자이자 '한국교회의 교부'로 꼽히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을 임명하는데, 이 단체는 훗날 숱한 박해 속에서도 조선교회가 발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당시 주 신부가 집필한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1796년 황심(토마스)을 베이징에 파견한 이래 해마다 밀사를 파견해 베이징대목구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단단한 통교의 끈으로 보편교회와의 일치를 이어나갔다.
 
 이처럼 주 신부가 성무 집행과 함께 성사를 베풀고, 교리서를 집필하고, 회장제와 함께 명도회를 도입해 전교함으로써 조선교회 교세는 주 신부 입국 당시 4000명에서 1801년에 1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비약적 발전을 이룬다. 조선에 단 1명 뿐인 사제, 주문모 신부의 선교사적 열정, 최창현이나 정약종, 강완숙 등 주 신부와 함께 시복의 영예를 안게 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대역사였다. 이는 또한 조선교회의 잇따른 사제 영입 요청에 따라 서양 선교사들이 아니라 조선 사람과 닮은 중국인인 데다가 신앙심도 깊은 주 신부를 선택한 베이징대목구장 알렉산델 드 구베아(A. de Gouvea) 주교의 혜안이 빚어낸 성과이기도 했다.
 
 오늘의 의미
 1752년 중국 쑤저우에서 태어나 불과 50년의 불꽃같은 생애를 살다간 이 중국인 사제의 선교는 오늘을 사는 우리 교회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60여 년 전이라면 청 고종 건륭제 재위 시기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자라나 베이징교구 신학교를 졸업하고 갓 사제품을 받은 새 사제가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하겠다는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 더욱이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순교의 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구베아 주교의 지시에 기꺼이 순명, 조선으로 향했다. 그건 오롯이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려는 열정 때문이었다. 1791년에 보내려 했던 오요한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조선 선교사로 선택됐지만, 그는 만민 복음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조선교회의 토대를 세웠고, 순교의 영예를 안았다. 하느님의 섭리였다.
 
 이제 '만민 복음화'의 공은 한국교회로 넘어왔다. 1979년 중ㆍ미 수교와 함께 공산화의 빗장은 풀렸지만, 아직까지도 종교와 지식인에 대한 제약만은 풀리지 않은 게 중국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이미 1849년 5월 말에서 12월 말까지 중국 만저우대목구 랴오뚱 차쿠 눈의 성모성당에서 최초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함으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북방 선교사가 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모범을 따라 이제는 한국교회가 북방선교를 준비해야 할 때다. 이것이 이번에 주 신부의 시복 결정이 한국 교회에 주는, 빼놓을 수 없는 의미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