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16>정광수·윤운혜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16>정광수·윤운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집안에서도 박해받은 부부, 신앙 모범 보이다 순교



복음서에는 박해하는 이와 박해받는 이의 모습이 등장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마태 10,21)

이처럼 가문의 박해, 가족 간 박해는 박해 가운데서도 가장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박해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자식 간, 형제자매 간에 맺어지는 혈육의 정에 호소하는 유형, 무형의 박해가 주는 중압감은 그 어떤 박해보다도 크기 때문이다.

124위 가운데 정광수(바르나바, ?∼1802), 윤운혜(루치아, ?∼1801) 부부는 가족에게서 많은 박해를 받은 경우다. 경기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 출신인 정광수가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출신인 윤운혜와 혼인하게 된 것은 천주교 입교가 계기가 됐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 조선왕조 치하 제2차 시복 추진 대상자)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윤운혜와 혼인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아픔을 견뎌야 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모가 혼인을 반대해 이들 부부는 혼인 문서조차 주고받을 수 없었고 집안에서는 교리를 지키며 실천할 수도 없었다. 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교회에서 금지하는 일이기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하고 거부해야 했다.
 
▲ 양근 대감마을과 여주군 일대 지도 지도제공=교회사연구소

결국 부부는 한양 벽동으로 이주한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송현동과 사간동, 중학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벽장처럼 동 사이에 길게 끼어 있고 다락처럼 길가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래서 ‘벽장골’ 혹은 ‘다락골’로 불리던 벽동으로 이주한 부부는 자기 집 한편에 따로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했으며,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이 집회소에 모였던 교우들이 홍필주(필립보)와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룸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부부는 특히 전교에 힘써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만들어 나눠줬고, 많은 교회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거나 팔았다. 또한 가까운 교우들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하곤 했다. 또 자식에게도 어려서부터 교리를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인도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머지않아 자신들도 체포될 것이라고 여긴 부부는 교회 서적과 성물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 숨겨놓았다. 그러고 나서 윤운혜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키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해 2월에 체포됐다. 당시 한양과 지방을 오가며 이리저리 피신하던 정광수도 포졸들이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된 자신에 대한 수사망을 좁혀 온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더는 피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잡혀간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부부는 포도청과 형조를 오가며 배교를 강요당하고 갖은 문초와 형벌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사형판결을 받은 윤운혜는 그해 5월 14일 참수됐으며, 같은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된 정광수는 이듬해 1월 30일 참수됐다.

부부가 한양으로 이주한 게 1799년이니 이들이 전교와 교리교육, 공동체 생활에 힘쓴 시기는 불과 2년 남짓하다. 그렇지만 그때가 이들 부부에겐 삶의 가장 아름다운 황금기였다. 어느 때나 하느님과 만나고 기도하며 자유롭게 신앙을 고백하고 많은 형제자매와 친교의 나눔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 부부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음의 수락은 자유로웠고 어떤 외적 저항도 없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죽음의 자유로운 수락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피의 세례를 통해 부부는 죄가 씻어지고 영원한 행복이 주어지는 은총을 하느님께 받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