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새로운 평화와 화해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새로운 평화와 화해
 
이웃과 기쁨·희망·슬픔 함께하며 평화 나눠야
 
▲ 그리스도의 평화는 편안함 속에서가 아니라 고통과 갈등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나눌 때 맛볼 수 있다. 사진은 2012년 여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의 바람 순례에서 청소년들이 참회와 속죄의 성당 앞에서 평화의 기수가 될 것을 다짐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귀한 당신!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추구를 통해 날마다 조금씩 이룩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평화 증진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 때에만 꽃필 수 있다. 분쟁과 폭력을 막으려면, 평화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가치로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그럴 때에 평화는 가정과 또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로 확산하고 결국 정치 공동체 전체의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495항).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외치며 교회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평화를 간직하고 유지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교회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시어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가르치신 예수님 가르침의 결정체다. 그 평화는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평화이며, 동료 인간과의 친교를 이루는 원천이다.

그렇게 간직해야 했던 그리스도의 평화는 때로는 세상에서의 실질적인 손해를 감수하게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평화를 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평화는 그렇게 십자가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평화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세상의 평화가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이야기한다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고통 중에서도 평화였다. 고통의 십자가를 외면하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평화인 것이다. 그 평화를 간직하고 살면서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자들 역시 똑같은 고난을 받아 안았다.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맹수의 입에서 찢겨 씹히는 먹이가 됐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그랬다. 1802년에 홍주에서 순교한 황일광 시몬은 그 신분이 백정이었다. 순교자는 입교하고 난 후, 다른 교인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해주는 것을 겪고는 이 자리가 바로 천당이요, 죽어서 내세에 천당에 또 가게 되니 천당은 두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조선 교회가 초기에 박해를 심하게 받은 것이다.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평화를 사는 것이기에 천하다고 여겼던 신분의 사람에게는 천당을 맛보게 했고 세상은 이런 교회가 당시의 풍습을 흐린다는 이유로 박해한 것이다.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평화의 자리가 초대교회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한반도는 지금 갈등의 극대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커다란 두 개의 집단이 갈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역사 노동 가정 등 갈등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단순히 몇 가지 문제를 손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이와 같은 갈등 상황이라면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 어떤 당이 국정의 주도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난감한 지경인데 오히려 정치세력 등은 갈등을 부추기고 그로부터 나오는 반사이익에 기대어 위기를 모면하는 형편이다. 언론 또한 중재와 화해로 이끌기는커녕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 데 전전긍긍하고 있다. 종교계 역시 이 때문에 휘말려 들어가거나 어떤 피해를 보지나 않을까 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해법 없이 갈등의 국면이 날카로워지기만 한다면 피해 당사자는 당연히 약자가 되고 만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쪽이 결국은 이기고 힘없는 이들은 밀려나고 또 밀려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숨은, 고통은 더해만 간다. 지금은 그 어떤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서로를 인간으로 봐주는 따뜻한 눈빛도 나누지 못하는데 그 어떤 제도가 효과를 낼 수 있겠는가?

예비신자를 모집하는 어느 본당 현수막이 기억이 난다. “천주교회는 ‘귀한 당신’을 기다립니다!” 여기에 교회 역할이 있다. 사람을 귀하게 보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중재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전문가 양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미 교회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고 있다. 이렇게 위로의 자리를 교회의 이름으로 만들고 열과 성을 다해 다가간다면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아니 몰라주면 어떤가?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커다란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그 평화는 안전하고 편안함 속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사랑 가득 찬 불가마 속에서, 이웃들의 고통과 슬픔의 현장에서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 깊숙한 곳에 함께하면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슴 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갈등도 해소될 것이며, 우리의 평화를 조금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다.



제공=교황방한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