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일어나 비추어라] 근현대 순교자들

[일어나 비추어라] 근현대 순교자들
 
교안·전쟁의 파도에 스러진 20세기 순교자들
 
▲ 평양교구 사제단이 1949년 교구 사제 피정을 마친 뒤 평양 관후리주교좌성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6ㆍ25전쟁 전후로 공산군에 의해 대부분 순교했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100년의 박해가 끝났다. 1888년에 윤봉문(요셉)이 처형된 적이 있지만, 1886년 이후 정부의 공식적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신앙 때문에 희생된 신자들이 있다. 교안(敎案)과 6ㆍ25전쟁 때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신자들이 그들이다.



전쟁과 공산군의 탄압

교안은 한불조약 이후 선교 과정에서 발생한 선교사와 지방관리, 일반 주민과 신자들 사이의 충돌을 말한다. 교안은 1886년부터 1906년 사이에 300건 이상 발생했는데, 1901년 제주교안 때에는 신재순(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해 300명 이상의 신자가 피살됐다.

이어 1950년 6ㆍ25전쟁 전후로 많은 천주교인이 희생됐다. 가장 먼저 탄압을 받은 곳이 덕원면속구와 함흥교구다. 1949년 5월 9일 사우어 주교와 3명의 신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6ㆍ25전쟁 직전까지 모든 성직자가 체포됐다. 평양교구에서도 1949년 5월 14일 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체포돼 구금되거나 행방불명됐다.

6ㆍ25전쟁 직전까지 자행된 탄압은 공산군의 남침과 함께 남한 지역으로 확대됐다. 먼저 강원도에서는 7월 2일부터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를 비롯해 캐나반(춘천본당)ㆍ크로스비(홍천본당) 신부가 체포됐고, 레일리(묵호본당)ㆍ매긴(삼척본당) 신부가 7월에 체포돼 피살됐다. 서울에서는 교황 사절 번 주교와 비서 부드 신부를 비롯해 공베르 형제 신부, 비에모ㆍ유영근 신부 등이 체포됐다.

7월 말부터는 충청도에서 폴리 신부(천안본당)를 비롯해 외국인 신부 9명과 강만수 신부가 체포됐고, 그중 7명이 9월 23일과 26일 사이에 대전에서 피살됐다. 목포에서도 광주교구장 브렌난 몬시뇰을 비롯해 3명의 외국인 신부가 체포됐는데, 이들도 대전에서 충청도 지역 성직자들과 함께 살해됐다.

이보다 앞서 9월 중순에는 서울 소신학교에서 이재현ㆍ백남창ㆍ정진구 신부가 체포됐고, 김한수(경향잡지사 총무)ㆍ정남규(명동본당 총회장)ㆍ조종국(명동본당 청년회 회장)ㆍ김정희(혜화동본당 회장)ㆍ송경섭(명동본당 청년회 부회장) 등 평신도들도 집에서 체포된 후 행방불명됐다.

한편 공산군은 7월 이후 남한 각 처에 수감돼 있던 신자들을 강제로 북송시켰다. 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서울에 잡혀 있다가 7월에 평양으로 이송된 후 9월부터 1951년 3월까지 만포, 고산, 초산,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수용소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들은 엄동설한의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180㎞를 걸어야 했고, 그 여파로 비에모 신부와 공베르 형제 신부가 중강진에서 병사했다.

옥사덕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와 수도자들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만포수용소, 관문리수용소를 거쳐 다시 옥사덕수용소로 오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등 여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목숨을 잃었다.

강제 북송과 함께 공산군은 1950년 10월에 퇴각하면서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살해했는데, 이때 김봉식(이천본당)ㆍ유재옥(겸이포본당)ㆍ이광재(양양본당)ㆍ서기창(송화본당)ㆍ양덕환(재령본당)ㆍ전덕표(사리원본당) 신부, 매화동본당의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 원산의 박빈숙 수녀 등이 피살됐다. 이에 앞서 7월에는 황해도의 이순성(정봉본당)ㆍ이여구(매화동본당) 신부가 체포된 후 행방불명됐다.



20세기 순교자들 시복 작업 진행

이처럼 근현대에 와서도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신자가 많다. 교회가 이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부터다. 당시 세계 각국 교회는 교황청 지침에 따라 20세기 들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조사 작업을 시행했다. 한국교회 역시 1998년 12월 총 215명의 순교자 명단을 확정해 교황청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9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하기로 하고, 각 교구에 조사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제출된 자료를 근거로 선정 작업을 거친 결과, 2013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됐다. 81위는 대체로 해방 이후 공산 치하와 6ㆍ25전쟁 와중에 희생된 분들이다. 그중에는 중국 애국회를 거부하고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5년 동안 중국에서 징역살이한 김선영 신부와 1901년 제주교안 당시 희생된 신재순도 포함돼 있다.

한편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시복을 추진하는 81위와는 별도로 베네딕도회에서도 2007년부터 수도회 소속으로 6ㆍ25전쟁 전후에 희생된 사우어 주교, 김치호 신부 등 ‘신 보니파시오와 김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 38위의 시복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제공=교황방한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