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신앙단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닮은 점

[신앙단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닮은 점
 
이승하 프란치스코(시인, 중앙대 교수)
 



내한 일자가 얼마 안 남은 프란치스코 교황이야말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헌신적인 사람, 겸손한 사람이 아닐까. 교황은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거나 경제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미사에 앞서 마피아에 목숨을 잃은 3세 아이의 유가족을 만나 위로했다. 아이는 폭력조직 간 세력 다툼 과정에서 할아버지 등과 함께 살해됐으며 불탄 자동차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교황은 유가족에게 “죽은 어린이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다. 절망에 빠지지 말라”고 위로하고 어린이들이 범죄조직에 희생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거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국제적인 마피아 조직 ‘은드란게타’에 파문을 선언했다.

바티칸 정원에서 열린 합동기도회에서 이스라엘 대통령,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를 비롯해 유다교ㆍ가톨릭ㆍ이슬람교 신자에게 전쟁 때문에 많은 어린이가 숨졌다며 중동의 평화를 촉구했다. 한 아기가 교황의 주케토(가톨릭 성직자의 모자)를 벗기자 교황이 웃으며 모자를 되찾아 고쳐 쓰고 있는 사진과 설교 중 의자에 올라앉은 한 소년이 TV 화면에 잡힌 장면도 우리의 입가에 웃음이 머물게 했다. 교황은 그만큼 소탈하고 겸손한 분이어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야말로 권위를 내세운 분이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에는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1202년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버려진 옛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였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극도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 동안 계속되면서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병세가 깊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숨을 거두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선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아이들을 특히 사랑한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점이 바로 닮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