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일정
15일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

서울공항

8월13일 오후 4시(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을 출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 날인 14일 오전 10시30분(이하 한국시각) 서울공항에 도착한다.

교황은 곧바로 숙소인 서울 궁정동 주한 교황청대사관으로 이동해 개인미사를 드리고 휴식을 취한 뒤 오후 청와대에서 열리는 공식 환영행사에 참석한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주한 외교사절 및 국무위원들 앞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다.

국빈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교황은 다음 행선지로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를 찾아가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만나는 것으로 첫 날 일정을 마무리한다.

▣ 성모승천대축일의 의미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서의 생활을 마친 후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올라갔음을 기념하는 축일로 마리아께 바쳐진 초대 교회시대의 교회 하나가 예루살렘에서 헌당식(獻堂式)을 행한(5세기) 날에 지켜졌다.

성모 승천은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를 믿어 왔으며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믿는 교리로 반포하였다. "원죄가 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생활을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을 믿을 교리로 밝히고 이를 선언하는 바이다"(비오 12세의 사도헌장, Munificentissimus Deus).

성모 승천은 비록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부터 내려오는 믿을 만한 전승(傳承)과 구세사(救世史)에 있어서 성모의 역할, 성모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 안에서의 성모의 위치 등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적 결론이다. 즉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성자를 잉태하여 생명의 창조주를 낳으신 마리아의 육체에 무덤의 부패를 면하게 하신 것이다.

승천에 대한 최초의 전례적 축일의 날짜와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3-4세기부터 순교자나 성인들을 그들의 사망일에 기념하는 사상에 부응하여 4세기 중엽의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의 죽음과 승천의 축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6세기경에는 그 명칭이 'Dormitio'(도르미시오, 일시적인 잠에 떨어짐)로 불렀으며 마우리치우스(Mauricius) 황제(재위 : 582-602)에 의해 8월 15일로 정해진 듯하다. 7세기에 동방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져 서방으로 전해졌으며 8세기에 8월 15일로 날짜가 확정되고 명칭도 'Dormitio'에서 '마리아의 승천'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이 날은 마리아 축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에서 이날은 의무축일로 지켜지고 있다. (⇒) 성모축일

▣ 아시아 청년 대회란?

아시아 청년 대회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온 가톨릭 젊은이들이 함께 모이는 행사이다. 아시아 청년 대회는 청년들이 비록 그들이 서로 다른 문화적, 사회적 배경과 다른 나라 출신이더라도,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영성을 체험할 것을 격려할 것이다. 아시아 청년 대회의 목적은 청년들이 그들의 신앙을 쇄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아시아 청년 대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91년, 폴란드, 체스토코바에서 세계 청년 대회가 열렸을 때, 아시아 30개국의 대표자들은 제3세계 청년 포럼에 참석하였다. 포럼 중에서 대표자들은 아시아의 가톨릭 청년들을 위한 희망찬 목소리를 모았으며, 그들의 뜻을 아시아 주교회의(FABC) 산하 신자와 가정 사무국(OLF)에 전달하였다. 1993년, 타이, 방콕에서 유스 컨설테이션 미팅이 열렸다. 아시아 각국에서 온 젊은 대표자들은 그 미팅에서 아시아의 젊은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조직을 만들기를 제안했고 아시아 주교회의는 그 의견에 진심으로 동조하였다. 아시아 주교회의는 대표자들과 의사소통 및, 그 조직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94년에 아시아 주교회의(FABC)는 산하 신자와 가정 사무국(OLF) 아래, 유스 데스크를 조직하였다. 유스 데스크는 아시아의 젊은이들과 청년 지도자 미팅, 즉 세계 청년 대회 중 아시아 청년 모임, 아시아 청년 봉사자 모임 등 각종 활동을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마침내 제1회 아시아 청년 대회가 타이의 후아힌에서 유스 데스크의 노력으로 개최되었다.

▣ 당진 솔뫼성지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 자리잡은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 송산이라고도 불리는 터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되었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포의 서학자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서 천주교로 발전하였다.

1784년경 김대건 신부님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김 신부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까지 하여 솔뫼를 ‘순교자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1906년부터 합덕본당 주임 크렘프 신부님은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하여 인근의 토지매입을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백 빌리버 신부님이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하였다.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여 1982년에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고, 국가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2004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생가를 복원, 2005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제 솔뫼 성지는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솔뫼성지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하여 순우리말로 ‘솔뫼’라 이름 붙여진 곳으로,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신 장소이다.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비오 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김 신부님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장소로,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이곳(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할아버지 김택현은 대건이 7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다. 소년 김대건은 그곳에서 15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上海) 진쟈상(金家巷:김가항) 성당에서 고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김 신부님은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순위도 앞바다에서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1925년 7월 5일 복자품, 1984년 5월 6일 가톨릭 교회의 성인품에 올려졌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조선 최초의 방인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고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전도를 만들었으며, 저서로는 21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1906년, 당시 합덕 성당의 크램프 신부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김 신부님의 생가터를 고증하였고, 1946년 순교 100주년을 맞아 순교 기념비를 세우면서 성지는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된 솔뫼성지는, 1만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와 더불어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기념관과 성당, 솔뫼 아레나(야외공연장 겸 야외성당), 순례자 식당, 그리고 넓은 주차장을 갖춘 가운데, 광활한 내포 평야의 한 복판에 자리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안에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124위 약전

번호성명세례명 출생지순교연령순교일 순교장소
1 강경복 수산나 39세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2 강완숙 골롬바 충청도 내포 40세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3 고성대 베드로 충청도 덕산 1816. 12. 19 경상도 대구
4 고성운 요셉 충청도 덕산 1816. 12. 19 경상도 대구
5 구성열 바르바라 충청도 홍주 40세 1816. 12. 19 경상도 대구
6 구한선 타데오 경상도 함안 22세 1866 경상도 함안
7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경기도 양근 33세 1802. 1. 30 경기도 양근
8 권상연 야고보 전라도 진산 40세 1791. 12. 8 전라도 전주
9 권천례 데레사 경기도 양근 36세 1819. 8. 10. 이후 한양
10 김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 50세 1815. 12. 5 강원도 원주
11 김계완 시몬 한양 1802. 1. 29 한양 서소문밖(또는 새남터)
12 김광옥 안드레아 충청도 예산 60세 1801. 8. 25 충청도 예산
13 김기량 펠릭스베드로 제주도 함덕 51세 1867. 1. 경상도 통영
14 김대권 베드로 충청도 청양 1839. 5. 29 전라도 전주
15 김사건 안드레아 충청도 서산 45세 1839. 5. 26 경상도 대구
16 김사집 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 58세 1802. 1. 25 충청도 청주
17 김세박 암브로시오 한양 67세 1828. 12. 3 경상도 대구
18 김시우 알렉시오 충청도 청양 32세 1815. 5.(음) (또는 181... 경상도 대구
19 김연이 율리안나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20 김원중 스테파노 충청도 진천 1866. 12. 16 충청도 공주
21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경상도 상주 50세 1815. 4. 말(음) (또는 1... 경상도 대구
22 김이우 바르나바 한양 명례방 1801. 5.(음) 한양 포도청
23 김정득 베드로 충청도 대흥 1801. 8. 25 충청도 대흥
24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충청도 덕산 50세 1839. 10. 경 전라도 전주
25 김종교 프란치스코 한양 47세 1801. 10. 4 한양 서소문밖
26 김종륜 루카 충청도 공주 49세 1868. 9. 14 경상도 울산
27 김종한 안드레아 충청도 면천 1816. 12. 19 경상도 대구
28 김진후 비오 충청도 면천 75세 1814. 12. 1 충청도 해미
29 김천애 안드레아 41세 1801. 8. 27 (혹은 8. ... 전라도 전주
30 김현우 마태오 한양 명례방 26세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31 김화춘 야고보 충청도 청양 1816. 12. 19 경상도 대구
32 김희성 프란치스코 충청도 예산 51세 1816. 12. 19 경상도 대구
33 문영인 비비안나 한양 25세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34 박경진 프란치스코 충청도 33세 1868. 9. 28. 경기도 죽산
35 박경화 바오로 충청도 홍주 70세 1827. 11. 15 경상도 대구
36 박대식 빅토리노 경상도 김해 56세 1868. 10. 12 경상도 대구
37 박사의 안드레아 충청도 홍주 47세 1839. 5. 26 경상도 대구
38 박상근 마티아 경상도 문경 30세 1867. 1. 경상도 상주
39 박취득 라우렌시오 충청도 면천 30세 1799. 4. 3 충청도 홍주
40 프란치스코 충청도 면천 1799. 1. 21 충청도 홍주
41 배관겸 프란치스코 충청도 당진 60세 1800. 1. 7 충청도 청주
42 서석봉 안드레아 1815. 말 경상도 대구
43 손경윤 제르바시오 한양 42세 1802. 1. 29 한양 서소문밖(또는 새남터)
44 베네딕토 충청도 충주 69세 한양
45 베드로 충청도 충주 46세 한양
46 신석복 마르코 경상도 밀양 38세 1866. 3. 31 (또는 3. ... 경상도 대구
47 신태보 베드로 경기도 70세 1839. 5. 29 전라도 전주
48 심아기 바르바라 경기도 광주 18세 1801. 4. 초(음) 한양 포도청
49 심조이 바르바라 경기도 인천 26세 1839. 11. 11 전라도 전주
50 안군심 리카르도 충청도 보령 61세 경상도 대구
51 양재현 마르티노 경상도 41세 1868. 9. 경상도 동래
52 마르가리타 1868. 9. 28. 경기도 죽산
53 오반지 바오로 충청도 진천 53세 1866. 3. 26 (또는 3. ... 충청도 청주
54 오종례 야고보 충청도 은진 19세 1840. 1. 4 전라도 전주
55 원경도 요한 경기도 여주 27세 1801. 4. 25 경기도 여주
56 원시보 야고보 충청도 홍주 69세 1799. 4. 17 충청도 청주
57 원시장 베드로 충청도 홍주 61세 1793. 1. 28 충청도 홍주
58 유문석 요한 전라도 전주 17세 1801. 11. 14 전라도 전주
59 유중성 마태오 전라도 전주 18세 1802. 1. 31 전라도 전주
60 유중철 요한 전라도 전주 22세 1801. 11. 14 전라도 전주
61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전라도 전주 45세 1801. 10. 24 전라도 전주
62 윤봉문 요셉 경상도 경주 36세 1888. 4. 1 경상도 진주
63 윤운혜 루치아 경기도 1801. 5. 14 한양 서소문밖
64 윤유오 야고보 경기도 여주 1801. 4. 27 경기도 양근
65 윤유일 바오로 경기도 여주 35세 1795. 6. 28 한양 포도청
66 윤점혜 아가타 경기도 1801. 7. 4 경기도 양근
67 윤지충 바오로 전라도 진산 32세 1791. 12. 8 전라도 전주
68 윤지헌 프란치스코 전라도 진산 37세 1801. 10. 24 전라도 전주
69 안나 경기도 인천 26세 한양
70 이 현 안토니오 경기도 여주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71 이경도 가롤로 한양 22세 1802. 1. 29 한양 서소문밖(또는 새남터)
72 이경언 바오로 한양 35세 1827. 6. 27 전라도 전주
73 이국승 바오로 충청도 음성 29세 1801. 5. 말(음) 충청도 공주
74 이도기 바오로 충청도 청양 55세 1798. 7. 24 충청도 정산
75 이보현 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 27세 1800. 1. 9 충청도 해미
76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2세 1839. 12. 5 (또는 12.... 전라도 전주
77 이성례 마리아 충청도 홍주 39세 1840. 1. 31 한양 당고개
78 이순이 누갈다 한양 20세 1802. 1. 31 전라도 전주
79 이시임 안나 충청도 덕산 34세 1816. 12. 19 경상도 대구
80 이양등 베드로 경상도 1868. 9. 14 경상도 울산
81 이일언 충청도 홍주 72세 1839. 5. 29 전라도 전주
82 이재행 안드레아 충청도 홍주 63세 1839. 5. 26 경상도 대구
83 이정식 요한 경상도 동래 73세 1868. 9. 경상도 동래
84 이조이 막달레나 32세 1840. 1. 4 전라도 전주
85 이중배 마르티노 경기도 여주 50세 1801. 4. 25 경기도 여주
86 이태권 베드로 충청도 홍주 57세 1839. 5. 29 전라도 전주
87 인언민 마르티노 충청도 덕산 63세 1800. 1. 9 충청도 해미
88 토마스 경기도 수원 51세 1866 충청도 청주
89 정광수 바르나바 경기도 여주 1802. 1. 29 경기도 여주
90 정복혜 칸디다 한양 인근 1801. 5. 14 한양 서소문밖
91 정산필 베드로 충청도 덕산 50세 1799 충청도 덕산
92 정순매 바르바라 경기도 여주 24세 1801. 7. 3 (혹은 7월 4... 경기도 여주
93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경기도 광주 41세 1801. 4. 8 한양 서소문밖
94 정인혁 타대오 한양 1801. 5. 14 한양 서소문밖
95 정찬문 안토니오 경상도 진주 45세 1867. 1. 25 경상도 진주
96 정철상 가롤로 경기도 광주 1801. 5. 14 한양 서소문밖
97 정태봉 바오로 충청도 덕산 43세 1839. 5. 29 전라도 전주
98 조 숙 베드로 경기도 양근 33세 1819. 8. 10. 이후 한양
99 조용삼 베드로 경기도 양근 1801. 3. 27 경기도 감영
100 주문모 야고보 중국 소주 49세 1801. 5. 31 한양 새남터
101 지 황 사바 한양 28세 1795. 6. 28 한양 포도청
102 비르짓다 충청도 56세 1839. 12. 8 (또는 12.... 강원도 원주
103 최봉한 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30세 1815. 5. 경(음) 경상도 대구
104 최여겸 마티아 전라도 무장 38세 1801. 8. 27 전라도 무장
105 최인길 마티아 한양 30세 1795. 6. 28 한양 포도청
106 최인철 이냐시오 한양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107 최조이 바르바라 경기도 여주 50세 1840. 1. 4 전라도 전주
108 최창주 마르첼리노 경기도 여주 52세 1801. 4. 25 경기도 여주
109 최창현 요한 한양 42세 1801. 4. 8 한양 서소문밖
110 최필공 토마스 한양 57세 1801. 4. 8 한양 서소문밖
111 최필제 베드로 한양 31세 1801. 5. 14 한양 서소문밖
112 최해성 요한 충청도 홍주 28세 1839. 9. 6 강원도 원주
113 한덕운 토마스 충청도 홍주 50세 1802. 1. 30 광주 남한산성
114 한신애 아가타 충청도 보령 1801. 7. 2 한양 서소문밖
115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전라도 김제 45세 1801. 8. 26 전라도 김제
116 허인백 야고보 경상도 김해 46세 1868. 9. 14 경상도 울산
117 현계흠 플로로 한양 38세 1801. 12. 10 한양 서소문밖
118 홍 인 레오 한양 44세 1802. 1. 30 경기도 포천
119 홍교만 F. 하비에르 한양 63세 1801. 4. 8 한양 서소문밖
120 홍낙민 루카 충청도 예산 50세 1801. 4. 8 한양 서소문밖
121 홍익만 안토니오 경기도 양근 1802. 1. 29 한양 서소문밖(또는 새남터)
122 홍재영 프로타시오 충청도 예산 60세 1840. 1. 4 전라도 전주
123 홍필주 필립보 충청도 덕산 27세 1801. 10. 4 한양 서소문밖
124 황일광 시몬 충청도 홍주 45세 1802. 1. 30 충청도 홍주

▣ 꽃동네

창립자인 오웅진 신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밥 동냥을 해서 18명의 병든 다른 노숙인들을 먹여 살리는 최귀동(1990년 선종) 할아버지를 보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며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사랑의 집’을 지어 1976년 꽃동네를 시작했다.

꽃동네는 “아무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의 최대의 종합복지시설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복지시설이다. 입양기관인 천사의 집부터 임종의 집까지, 한국사회에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과 환우들, 그리고 장애인들과 알코올 중독자, 행려자들을 예수님으로 모시고 봉사하고 있다.

현재 꽃동네는 음성 꽃동네를 모원으로 하여, 가평 꽃동네, 강화도 꽃동네에 5000여명의 국내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필리핀, 우간다, 아이티, 인도, 캐나다, 미국 꽃동네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꽃동네는 ‘사랑의 연수원’(1986년 설립)을 통하여 매년 20∼30만 명의 학생, 직장인, 군인 등에게 생명의 존엄성, 가정과 사회, 국가와 인류의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는 ‘국민 교육장’이다.

꽃동네 재정은 후원회원들의 후원회비와 나라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꽃동네 초기에는 전액 후원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었으나, 현재는 100여 만의 꽃동네 후원회원 중 매달 후원 회비를 내는 후원회원은 약 11만 명이며, 정부가 일부 지원하고 있고, 자원봉사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꽃동네 운영은 예수의 꽃동네 자매회(회원 211명),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회원 65명), 그리고 예수의 꽃동네 제3회원(1,000여명)의 헌신적인 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 서산 혜미읍성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지금은 해미 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칠십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해서 죽였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로 귀환되었고 바로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비가 있다. 2009년 1월 8일에 자리개돌 원석은 여숫골 순교자 기념관 맞은편에 옮겨 보존되어 있고 그 터에는 모조품이 자리를 하고 있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순교탑과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비신자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 명동성당

서울대교구주교좌 명동대성당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이 천주학을 접했다.

그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수호통상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대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