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124위 순교지를 가다 <7>남한산성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7>남한산성순교성지
 
세계문화 유산 안에 살아 숨 쉬는 순교 신심
 

 

▲ 예로부터 주요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진 남한산성은 박해시기 여러 지역 신자들이 치명한 ‘순교 터’다.

1801년 경기도 광주. 한 옹기장수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벌이가 될 법한 사람 많은 고을은 모두 지나쳤다. 그에게 옹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덕운(토마스, 1752~1802)이 옹기장수로 변장해 가고 있는 곳은 한양. 박해받는 교우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한양 근처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덕운은 근처에서 거적에 쌓인 시신을 발견했다. 동네 주민이 그에게 말했다. “홍낙민이라 하더이다. 천주를 모시다 저리됐다 들었소.” 한덕운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가 잘린 시신 앞에서 끓어오르는 비통함을 느끼며 홍낙민(루카, 1751~1801)을 애도하는 기도를 바쳤다.

그날 이후 한덕운은 서소문 밖 형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최필제(베드로, 1770~1801)의 시신을 찾은 한덕운은 그의 장례를 치러줬다. 하지만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자신 또한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 머지않아 한덕운은 체포돼 한양 관아로 끌려갔다.

포졸들의 고문은 극악무도했지만 한덕운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한덕운에게 내려진 것은 참수형. 죄인에 대해 그가 살던 고장에서 형을 집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실행됐던 해읍정법(亥邑正法)에 따라 그는 광주 남한산성으로 보내졌다.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 길, 한덕운이 형장에 자리하자 망나니는 사납게 생긴 칼을 들었다. 그때 그가 망나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단칼에 베어주시오.”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눈빛에 망나니는 겁을 먹었다.

당황한 망나니는 두 번이나 헛칼질을 했고, 결국 세 번째 칼날에 한덕운의 목이 떨어졌다. 그리고 구경꾼이 떠난 형장에는 맑은 계곡 물소리만 감돌았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남한산. 자동차를 타고 산비탈 도로를 5분 정도 오르면 귀가 먹먹해질 때쯤 ‘남한산성’이라 쓰인 큰 비석이 보인다.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약 10㎞의 성벽.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이다.

삼국시대와 신라, 조선 시대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평가됐던 남한산성은 조선 후기 여러 관청이 자리하면서 천주교 박해의 대표적 장소가 됐다. 포도청에서 인력이 모자라면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에서까지 천주교 신자를 심문할 정도였다. 이런 모진 박해에 순교한 신자만 300여 명. 그리고 이 중에는 오는 8월 시복되는 하느님의 종 한덕운이 있다.

남한산성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인들의 이목이 남한산성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한산성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비석만이 알려주는 곳

남한산성 동문 밖 주차장 한쪽에는 ‘남한산성옛길’이라 적힌 돌비석이 놓여있다. 그마저도 주차된 자동차와 나뭇잎에 가려 비석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교회사 학자들은 이곳을 한덕운 순교자의 치명 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산성 동문은 송파장과 덕풍장, 경안장 등 당시 장터가 성행했던 곳으로 유동인구가 많아 참수의 본보기를 보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덕운은 장터에 모인 인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기쁘게 맞이했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순교자의 피가 서린 동암문(시구문)

동문 근처에는 동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동암문 안은 어둡고 캄캄해 마치 짧은 터널을 지나는 듯하다. 약 200년 전,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사형 명을 받고 동암문 밖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박해기간 동안 이 동암문 앞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만 300명이 넘는다.

 

▲ 동암문 옆 계곡. 박해시기 순교자의 시신은 모두 이곳으로 내던져졌다.

동암문 옆 절벽 아래에는 계곡 물이 흐른다. 증언에 의하면 순교자들의 시신은 따로 처리되지 않고 이 계곡에 버려졌다고 한다. 처형된 사람 수가 많을 때에는 나뭇가지에, 돌담 사이사이에 순교자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맑게 흐르는 계곡 물을 한참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서린 순교자들의 피가 보이는 듯하다.

 

 

▲ 남한산성순교성지 현양비. 아래 비석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칼을 떠올리며

동암문에서 남한산성순교성지까지는 약 1㎞. 잘 정돈된 인도를 15분 정도 걸으면 남한산성순교성지 근처 주차장에 닿는다. 이곳은 200년 전 순교자들이 고초를 겪었던 포도청과 피를 흘리며 갇혀 있던 옥사가 있던 자리다. 그러나 지금은 주차장 귀퉁이에 놓인 작은 비석 하나만이 포도청 자리였음을 가늠케 할 뿐이다.

포도청 터에서 약 50m 정도 들어가면 남한산성순교성지 초입에 들어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높이 솟은 현양탑. 높이 4m에 돌 무게만 100t 되는 현양탑은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 목에 썼던 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현양탑은 낮은 기와 돌담이 둘러쳐진 잔디밭에 있는 탓에 꼭 작은 성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현양탑 비석에 새겨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한 분씩 마음속으로 외쳐보게 된다. ‘한덕운, 김만집, 정여삼, 이화실….’  

 

남한산성순교성지

남한산성순교성지 전담 박경민 신부는 기자와 동행하며 성지 곳곳에 담긴 순교 영성에 대해 설명했다. 먼저 살펴본 곳은 성전. 제대 위 십자고상에 달린 예수님은 순교자들처럼 목에 칼을 쓰고 있었다. 또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한덕운의 순교 장면과 남한산성의 모습이 초여름 햇빛에 색색으로 나타났다. 성당 외벽에 그려진 참수와 교살, 백지사형 등 그림을 설명한 박 신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덕운 순교자는 교우의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을 위로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로 연령회장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제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서 더 많은 분이 이곳을 찾아올 겁니다. 그럴수록 한덕운 순교자를 비롯해 35위 순교자와 무명 순교자 300여 명의 순교정신을 함께 본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글·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