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첫 순교자, 세월ㆍ신분 초월해 친교 맺고 같은 날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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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묫자리'로 불리는 해미 순교성지. 1797년 정사박해 당시부터 시작해 1890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언민과 이보현 등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이곳 해미읍성 생매장터 등에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사진제공=대전교구 홍보실 |
'해미'하면 읍성(邑城)이 먼저 떠오르게 마련이다. 순천의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 읍성의 원형을 잘 간직한 해미읍성은 1414년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에서 옮겨오면서 1651년에 청주로 옮겨지기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다. 읍성 또한 그런 이유로 1491년에 성곽을 축조, 200여 년간 군사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해미가 1797년 정사박해를 기점으로 피의 박해 현장으로 떠오른 것은 이처럼 해미읍성이 내포의 핵심 군사기지였기 때문이다.
해마다 3월이면 사적 116호 해미읍성은 유채꽃이 만발한다. 제주 산방산 유채꽃이 아름다운 바다의 서정으로 홀린다면, 해미읍성 유채꽃은 아늑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하지만 읍성 곳곳에, 특히 회화나무에 서려 있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심을 떠올리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해미성지는 순교자들의 신앙과 말없는 가르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해미를 '내포교회의 꽃'이라고 부른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정사박해 순교자인 인언민(마르티노, 1737~1800)과 이보현(프란치스코, 1773~1800)이다. 이들은 이번에 시복이 결정된 순교자 124위에 포함됐고, 김진후(비오, 1739~1814) 순교자까지 포함하면 해미는 순교자 3위가 8월에 시복되는 기쁨을 안게 됐다.
인언민은 원래 양반이었다.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삽교평야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 높은 학식을 쌓은 그는 황사영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는 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그는 맏아들을 주 신부 곁에 남겨뒀고, 얼마 뒤에는 차남으로 하여금 유명한 교우 집안의 딸과 혼인하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했으며, 정사박해가 시작되면서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체포 당시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 그리고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를 거쳐 고향인 해미로 이송돼 갖은 문초를 다 받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다가 1800년 1월 9일 혹독한 매질에다 돌로 가슴을 내리치는 형벌을 받으며 순교한다.
양반은 아니었지만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예덕로)의 부유한 양인 집안 출신이었던 이보현은 고향 인근에 살던 누이의 남편(자형) 황심(토마스, 1757~1801)에게서 교리를 배워 신앙을 받아들였다. 성장기엔 얼마나 난폭했는지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던 그는 신앙에 입문하면서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혼인을 한 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돼 해미로 끌려가 모진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며, 인언민과 같은 날 순교했다. 해미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수난을 견디다가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는 아픔 속에서 순교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해미옥에서 이뤄진 인언민과 이보현의 만남이 특히 눈물겹다. 60대 노인과 20대 후반 청년의 만남이었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이들은 신앙 속에서 깊은 친교를 맺고 순교에까지 이른다. 언제 어디서든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터다. 그런데도 이들은 옥에 끌려가서도 '늘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기쁨의 덕행을 통해 신앙의 증인이 된 하느님의 종이 바로 인언민과 이보현이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