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순교, 같은 날 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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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현 작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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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섭 작 '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
정약현ㆍ약전ㆍ약종ㆍ약용으로 이어진 나주 정씨 4형제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서학(西學), 정확히는 천주교와 직ㆍ간접적으로 얽힌 이들 4형제는 성호(星湖) 이익(1681~1763)으로 대표되는 '성호학파'를 통해 서학을 접한다. 특히 맏이 약현(1751~1821)의 처남인 이벽(요한 세례자, 1754~1785)과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은 이들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약전(1758~1816)ㆍ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ㆍ약용(요한, 1762~1836) 3형제는 조선교회 지도자로 활약했고, 특히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땐 3형제가 김범우의 집에 모여 기도하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3형제의 길은 서로 달랐다. 단 하나밖에 없는 조선의 해양생태서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 정약전은 1790년 제사를 금지하는 베이징대목구장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이 조선교회에 전해지자 신앙을 버렸다. 조선 실학의 거봉 정약용은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의 '진산사건'(1791)을 계기로 신앙을 버렸다고 전해지지만,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가 박해 중 배교했지만 유배 뒤 뉘우치고 다시 신앙을 회복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들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길을 걸어간 인물은 정약종이었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한 것은 1786년 4월 중형 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천주교를 접한 지 4~5년이 지나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와 가족을 가르치는데 전심했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그의 형제들은 이즈음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했으나 그만은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그는 자주 한양에 올라가 성사를 받고 교회 일을 처리했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천주교를 이해하기 쉽도록 편찬한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두 권으로 완성했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승인을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됐다. 1799년 초에는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에 임명돼 신앙 공동체의 유지와 교리교육, 전교 등에 힘썼다.
정약종의 활동은 1801년 신유박해 직전까지 계속됐으나, 1801년 1월 10일 조정에서 윤음(倫音)을 반포, 천주교 박해를 공식화하면서 다음달 곧바로 체포된다. 체포 이튿날부터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지만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3개월 뒤 서소문 밖에서 41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정약종의 신앙은 특히 순교 장면에서 더욱 돋보인다. 형장으로 향할 때에도 군중을 향해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용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아버지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정철상(가롤로, ?~1801)은 포천의 유명한 신자인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의 딸을 아내로 맞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체포되자 그는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돼 형조에서 문초를 받다가 그해 5월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다.
부자의 순교는 1839년 기해박해에 이르러 정약종의 부인과 두 자녀의 순교를 통해 '일가족 순교'와 성인 복자라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보기 드문 기록으로 남게 된다. 두 번째 부인 유조이(체칠리아, 1761~1839), 둘째 아들 정하상(바오로, 1795~1839), 막내 딸 정혜(엘리사벳, 1797~1839)는 1984년에 이미 성인 반열에 올랐고, 정약종과 맏아들 철상은 이번에 시복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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