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선구자, 조선의 첫 여성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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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교회 최초의 여성회장인 강완숙(골룸바)의 초상. 사진제공=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 |
유교, 특히 예학이 종교화한 사회였던 조선.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 여성의 지위는 봉건적 가부장질서 속에서 크게 후퇴했다. 물론 지배층에서야 교육이나 상속권 인정을 통해 일부나마 지위를 보장했지만, 평민이나 천민층에선 그렇지 못했다. 그랬기에 인간은 하느님 모상으로 태어난 평등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그만큼 파격이었고, 여성으로서 자존을 일깨웠다.
천주교를 통해 참된 삶의 가치를 깨우친 조선 여성들은 기꺼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신앙을 실천하며 순교에까지 이른다. 그 중심에 강완숙이 자리했다. ‘조선교회 첫 여성회장’ 강완숙(골룸바, 1761∼1801)은 유교 질서 속에서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하며 참된 삶을 추구한 실천가였다. 강완숙의 활약 덕에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했던 조선교회 신자 수는 1801년 신유박해 직전에는 1만여 명을 헤아린다. 이 가운데 여성 신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강완숙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케 한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도 강완숙을 ‘사학의 괴수’로 꼽았다.
천주교에 입교하기 이전 강완숙의 삶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충청도 내포 출신으로 양반의 서녀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지혜가 뛰어나고 정직했으며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장성한 뒤 덕산에 살던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용렬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했다. 그때 천주교를 접한 강완숙은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은 뒤 믿음을 갖게 됐고, 집안 식구와 이웃에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예비신자이면서도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돌보다가 갇히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전처 아들 홍필주(필립보, 1774∼1801)도 이때 입교했다. 하지만 남편에게만은 복음을 전하지 못해 시달림을 받아야 했고, 훗날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살았다.
강완숙의 생애는 복음화에 온전히 투신한 삶이었다. 시어머니, 아들과 함께 내포에서 한양으로 이주한 뒤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1795년 뒤늦게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강완숙은 곧바로 여성회장에 임명돼 조선 복음화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난처와 집회장소로 제공했다. 윤점혜(아가타, ?∼1801)가 이끈 동정녀 공동체의 활동도 모두 그의 집에서 이뤄졌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의 관습 덕이었다. 사족가의 부녀자들은 물론 과부와 머슴, 하녀 등이 강완숙의 권유로 입교했고, 철종의 조부 은언군 이인(1754∼1801)의 부인 송 마리아(?~1801)와 며느리 신 마리아(?~1801) 등 왕실 인물들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다. 상하 계급을 가리지 않고, 계급의 차별을 넘어 복음을 전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뤄 하느님 백성으로서 함께하는 여정을 걸어간 신앙의 선구자, 그가 바로 강완숙이었다.
그러나 1801년 박해가 일어나면서 강완숙은 그해 4월 6일 자신의 집에서 체포돼 포도청에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그는 주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하도록 도왔다. 박해자들은 그에게서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 여섯 차례나 혹독한 고문을 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신심공부를 게을리지 않고 함께 갇힌 동료들을 권면했으며, 1801년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기꺼이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강완숙의 투신이 없었다면 조선의 복음화는 가능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조선에서 천주교가 ‘양반계급’에서 벗어나 ‘평민과 천민, 여성’ 계층으로 대중화하는 데 강완숙의 기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하는 게 아니라 비전을 갖고 미래를 향해 직면한 시련을 이겨나가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다”는 아놀드 토인비(1889∼1975)의 역사발전론을 떠올리게 된다. 양반이었지만, 첩의 자식인데다 여성이었고 후처로 살았음에도 조선의 복음화에 크게 이바지한 강완숙의 삶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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