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 D-11] 시복의 기쁨 안은 124위 후손들(2) 권상문·천례 남매 6대손 권혁훈씨
▲ 하느님의 종 124위 중 권상문ㆍ천례 남매 후손 권혁훈씨가 부인 이순옥씨와 함께한 자리에서 족보를 보여주며 선조들의 순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오세택 기자 |
“모든 일의 기준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채워주셨지요.”
124위 중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769∼1802)ㆍ천례(데레사, 1784∼1819) 남매의 6대손 권혁훈(가스파르, 68, 서울 성북동본당) 한국천주교창립선조후손회장은 안동권씨 추밀공파 집안의 대를 이은 순교와 신앙전승 비결을 이렇게 전한다.
대를 이은 순교는 무려 5대다. 권철신(암브로시오)ㆍ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권상문ㆍ천례 남매→권황→권복(프란치스코)ㆍ권석 형제→권승렬(프란치스코)까지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유일한 사례다. 권일신의 이종사촌과 조카, 조카사위, 사위, 사돈 등 친ㆍ인척까지 포함하면, 124위 중 13위가 이 집안과 직ㆍ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더 놀라운 건 한 번도 신앙 전승이 끊기지 않았다는 점. 권철신ㆍ일신 형제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선교후손회 권혁훈(가스파르, 68, 서울 성북동본당) 회장까지는 7대, 아들 형제(권순주 요셉ㆍ순범 라우렌시오)까지 포함하면 8대다. 한 집안인 권구택(서울대교구 국내수학) 신부까지는 11대까지 대를 이어 신앙이 전승된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신앙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그랬기에 이들 가계는 ‘천주학쟁이’라는 이유만으로 1807년 「안동권씨추밀공파세보」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그러고나서 1961년에 발행된 신축보(申丑譜, 신축년 족보)에서 살아나기까지 족보에 실리지 못했다. 이에 따라 약식 가첩(家牒)으로 족보를 대신해야 했다.
“1960년 무렵, 문중에 선친(권오진 레오, 1922∼1994)께서 저희 가계를 족보에 다시 올려줄 것을 요청했을 때엔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양근 선산을 보여주고 나니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혈손으로 저희를 받아들였지요. 권일신 할아버지 후손을 제외하고 그 형제 4남2녀 후손이 다 절손된 것을 아시고서는 다 울었어요. 천주학쟁이라고 해서 집안이 쑥대밭이 된 지 150년이 넘어 돌아오게 된 셈이지요.”
그래선지 권 회장은 이번 시복에 대해서도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고 고백한다. 훌륭한 선조들의 신앙을 제대로 이어나기 못할까봐서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순교로 신앙을 지킨 선조 할아버지들을 떠올리며 극복했다”고 털어놓은 권 회장은 “앞으로도 ‘기도’와 ‘공부’와 ‘실천’으로 신앙을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권 회장은 특히 어려서 부모께서 물려준 ‘신앙 전수’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조과, 만과는 물론 주일미사는 꼭 참석해야 했고, 불참하면 한 끼를 굶어야 했다. 어려서는 신앙 선조들의 순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보니 하느님보다, 예수님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고 고백한다. 요즘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성당에 가서 아침기도를 바치고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나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저녁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돌아보면 모든 게 성령께서 인도하신 듯하다”는 권 회장은 이번에 직계 선대 2위의 시복이 이뤄지는 것도 기쁘지만, 사실은 권상문ㆍ천례 남매의 시복보다 이들의 선대인 권철신ㆍ일신 형제의 시복 추진이 지난해에 이뤄지게 된 게 더 기쁘다고 했다.
“5∼6년 전, 1807년 목판본 족보에서 권철신ㆍ일신 할아버지들의 함자가 지워진 것을 처음 확인했었지요. 그런데 그곳에 ‘이사학장폐(以邪學杖斃)’, 곧 천주교를 믿어 때려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그 문장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이 문장 하나로 시복 추진이 성사됐습니다. 전에는 순교가 아니라는 둥, 배교자라는 둥 얼마나 말이 많았는데요. 후손된 입장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이제는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열심히 선조들의 삶의 흔적과 신앙을 따르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