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13>복음의 나라 꿈꿨던 최창주·조이 부녀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13>복음의 나라 꿈꿨던 최창주·조이 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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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조이 등이 순교한 전주 서문 밖 형장 숲정이 성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진북동 숲정이 유래비' 최조이 등이 순교한 전주 서문 밖 형장 숲정이 성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진북동 숲정이 유래비’. |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와 최조이(바르바라, 1790~1840)는 한결같은 신심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순교 은총을 함께 입었다. 물론 이들의 죄상을 적은 보고서나 사형선고문에는 ‘흉악’(凶惡)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다. 마치 ‘주홍글씨’와도 같았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고 해서)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흉악합니다”(경상감사 보고서). “최조이는 그 부친과 시아버지(신태보 베드로, ?~1839)가 모두 천주교 신자로 흉악한 종자이며,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믿어 고질이 됐습니다”(사형선고문).
하지만 이들의 신앙살이가 어찌 흉악할까. 이들의 믿음과 삶이 흉악했다는 판단은 ‘유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이다. 이제 이들 부녀가 순교한 지 각각 213년, 174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흉악’이라는 주홍글씨는 ‘시복 결정’이라는 영예로 돌아왔다.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인 최창주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건 40대 초반의 일. 입교하자마자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가 배교하고 석방됐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지은 죄, 곧 배교를 깊이 뉘우치며 순교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했다. 더불어 가족과 이웃 교우들에게 힘써 신앙을 권면했으며, 두 딸을 모두 교우들에게 출가시켰다. 그중 한 딸은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요한, 1774?∼1801)의 아내이고, 다른 한 딸이 신태보(베드로, ?∼1839)의 며느리 최조이다.
1800년 부활 대축일 여주에서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사위 원경도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최창주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고, 그의 어머니 또한 피신을 종용하자 그는 한양으로 피신키로 하고 길을 떠났다. 하지만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순교를 다짐한 원의를 되찾고 당일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 체포돼 여주옥에 갇혔다. 물론 그는 “아는 천주교 신자를 대라”는 여주관장의 문초에도 밀고를 거부했다. 여주관아와 경기감영에서의 잇따른 문초와 형벌로 점철된 6개월간의 옥고 끝에 그는 고향 여주로 압송돼 1801년 4월 25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어려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최조이는 아버지가 순교한 뒤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천주와 이웃에 대한 그의 열렬한 애덕과 인내, 신앙 실천은 주위를 탄복케 했다. 신태보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돼 이름조차도 조이(양인의 과부인 경우 한자 표기로는 ‘召史’라고 쓰고 조이라고 읽는다)라고 불렸다. 시아버지 곁에 홀로 남은 탓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결코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1827년 정해박해 때는 시아버지와 함께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그때 시아버지는 전주옥에 갇혀 12년 동안 지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최조이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면서 옥에 갇힌 시아버지를 돌봤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 살던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의 집에서 함께 살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돼 1840년 1월 4일 전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향년 50세였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형조 관계 문서를 편집한 「사학징의」(邪學懲義)는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들의 죄상을 기록하며 ‘흉악하다’ ‘죽어도 싸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졌다’고 기록한다. 이는 순교자들이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신앙과 사조를 통해 신분제 사회의 질곡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 했던 의지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그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굳건한 신앙 속에서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으로 걷는 길이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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