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특권 내려놓고 순교의 길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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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6년 3월 당시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위 관계자들과 함께 여주성당 경내에 세워진 여주 순교자 현양비 앞에서 시복 대상자에 대한 현장조사를 한 뒤 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 빗돌은 2004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석 뒷면에는 순교자들의 명단과 짤막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수원교회사연구소 |
‘양반(兩班)’은 조선의 특권층이었다. 남부러울 게 없었다. 이들은 서원이나 서당을 통해 교육 기회를 독점했고, 과거 응시는 물론 벼슬자리로 나아가는 입사(入仕)에서도 배타적 특권을 누렸다. 오늘날로 치면 병역 의무에 해당하는 군역(軍役)조차도 특전을 확보했다. 한번 양반이 되면 반역과 같은 대죄를 짓지 않는 이상 관직과 토지가 주어졌고, 수족과 같은 노비를 대대로 전할 수 있었다. 자녀균분제에 따라 가산도 물려줬다. 더 바랄 게 없는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인 이중배(마르티노, ?∼1801)나 사촌인 원경도(요한, 1774∼1801)는 기꺼이 양반의 특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기쁘게, ‘신앙의 길’, 장차는 ‘순교의 길’을 걸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 공동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왕, 만물의 크신 주님” 때문이었다.
양반, 그것도 소론(少論) 집안 출신인 이중배가 조선 사회를 지탱해온 이데올로기 ‘효’를 몰랐을 리 없다. “백발의 아비를 남겨두고 죽고자 하느냐?”는 아버지의 눈물 섞인 호소에도 “아버지, 제가 효심의 진정한 원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천상의 일을 생각해 볼 때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옳겠습니까?”하고 반문하며, 이중배는 끝끝내 죽음을 선택한다. 이중배의 신앙생활이 길었던 것도 아니다. 이중배가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이 1797년이니, 신앙을 접한 지 불과 4년 만에 순교에 이르렀다.
그에게 교리를 전한 이는 ‘노론(老論)’ 출신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김건순(요사팟, 1776∼1801)이다. 물론 김건순은 교회의 순교 요건에 교회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합치되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처형된 천주교 신자’ 혹은 ‘천주교 관계 참수자’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에게 교리를 배운 이중배는 교리에 대해 듣자마자 신앙을 받아들여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고,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순교하기에 이른다.
사촌 이중배와 함께 김건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원경도 또한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황사영 백서」 8행에 보면, 이중배와 원경도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백서 해제본에 보면, “1800년 경신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두메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큰 소리로 희락경(喜樂經, 부활삼종기도의 옛말)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중배와 원경도, 그 일행이 체포된다. 일행이 여주관아에 도착하자 관장은 배교를 강요하고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독촉했다. 그럼에도 원경도는 일행을 대표해 “천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6개월 넘게 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원경도의 장인 최창주도 함께 갇혔다. 1800년 10월에는 경기감영으로 이송돼 다시 형벌을 받아야 했고, 이듬해 신유박해가 공식화되면서 여주로 끌려와 처형된다. 경기감사를 통해 이들의 최후 진술을 들은 조정이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이른바 ‘해읍정법(亥邑正法)’의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날이 1801년 4월 25일이었다. 이중배는 50세쯤이었고, 원경도는 27세였다.
부자와 모자, 그 혈육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중배와 원경도의 신앙은 허투루 하루하루를 그냥저냥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살이, 그 본질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믿기만 하면 박해가 시작되는’ 엄혹한 시기에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복음 선포에 투신하며,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갔던 순교자들의 모습은 황사영 백서에까지 기록돼 오늘날에 전해져 그야말로 ‘신앙의 거울’이 되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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