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 <23>이현 안토니오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 <23>이현 안토니오
 
배교 뒤 더 다져진 신앙
 
▲ 이현



124위 중 한 명인 이현(안토니오,?~1801)은 여주 출신이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다. 그가 천주교를 접한 건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때에 이미 그는 교회서적을 얻어보고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숙부 이희영이 노론(老論) 출신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김건순(요사팟, 1776∼1801)의 집에서 살게 되자 그 집을 자주 왕래하다가 1797년 김건순에게 교리까지 배우게 된다. 점차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고 여기게 된 그는 한양에 올라와 홍필주(필립보, 1774∼1801)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깊이 공부한 뒤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러고나서 정광수(바르나바, ?∼1802), 최필제(베드로, 1770~1801)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기도모임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그후 그는 홍익만(안토니오, ?~1802)의 딸과 혼인해 홍필주와 동서 사이가 됐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이현은 붙잡혀 포도청에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계속된 문초와 형벌에 일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답변했다. 물론 교우들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다시 형조로 이송된 그는 포도청에서의 변절을 깊이 뉘우치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며 회두했다. 이때부터 박해자들이 아무리 형벌을 가해도 그는 배교를 하지 않았고,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1801년 7월 2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자 이현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숙부 이희영(루카, 1756∼1801)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현은 그리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지만, 이희영은 김두량(1696∼1763), 박제가(1750∼1805) 등과 함께 서양화법을 조선화에 도입한 당대의 화가였다. 그래서 저명한 서화가 오세창(1864∼1953)은 이희영이 그린 ‘견도’(犬圖,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가 서양화법을 이용해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다 이희영은 당대에 이미 성화와 상본을 그린 작가로도 유명했다. 물론 그의 성화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백서’를 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에게 예수상 3본을 보낸 일이 드러나 처형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성화가로서 이희영을 부인하는 역사가는 없다. 그렇지만 조카 이현은 순교자로서 시복을 눈앞에 두게 됐지만, 이희영은 대역죄인이라는 죄명을 쓰고 죽었으며 순교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희영은 1794년 말 주 신부가 입국한 후 이중배(마르티노, ?∼1801), 원경도(요한, 1774∼1801) 등과 함께 입교했다. 입교 후 한양으로 이사한 그는 향교동에 살며 그림을 그려 생활했다. 성화에도 능했지만, 영묘화(靈描畵, 동물이나 곤충 그림)나 남종화풍 산수화도 그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세례명이 루카였던 것을 보면, 그가 이미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성화가 루카 사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조카보다 먼저 체포된 이희영은 신문을 받던 중 배교했다. 그러나 그는 석방되지 못하고 이현의 순교에 앞서 그해 5월 11일 김건순의 종형 김백순(?∼1801) 등과 함께 45세의 나이로 참수됐다. 김건순 또한 그해 6월 1일 처형됐는데,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가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형벌 관련 문서인 ‘결안(結案)’은 그가 신문을 받으며 한 번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교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희영과 김건순이 ‘배교했으나 석방되지 못하고 참수됐다’고 기록된 대목은 좀 이상하다. 천주교 신자로 끌려가 배교했다면 석방되는 게 정상적일 텐데 그렇지 않아서다. 김건순이야 당대 집권층인 노론인데다 척화파 김상헌(1696∼1763)의 양자였기에 배교에도 불구하고 양자 파기, 곧 파양까지 당하며 처형됐다지만, 그의 친구인 이희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금부 추국 당시 결안에는 이희영의 배교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황사영의 백서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그가 순교자로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조정 대신들도 그의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처형했다.

이를 감안하면 이희영은 순교 여부는 향후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성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이희영이 자료 부족으로 순교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현양할 수 없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