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124위 순교지를 가다<10>원주 강원감영

124위 순교지를 가다<10>원주 강원감영
 
단단한 창살도 강물처럼 흐르는 신앙을 막지 못했다
 

 

 

경기도ㆍ강원도ㆍ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황해도. 조선 시대에는 한반도 행정구역을 8개로 나눠 조선 팔도라 칭했다. 그리고는 각 지역을 담당하기 위해 ‘감영’이라는 관아를 두었다. 즉, 감영은 지금의 도청 역할을 하던 곳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의 명을 따라 움직였던 감영. 1800년대 강원감영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관동지방 일대 산골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하느님의 종 124위인 김강이(시몬, 1765~1815)와 최해성(요한, 1811~1839), 최 비르지타(1783~1839)도 있었다.

 

 

 

강원도 원주에 인접해 있는 치악산. 산세가 험준하기로 유명한 치악산이 7월의 옷으로 갈아입고 그 푸름을 기세등등하게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산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원주천은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과 개운동을 거쳐 일산동을 지나 섬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 원주천 동쪽 인동사거리 근처에 강원감영이 있다. 강원감영은 8도 제가 시행된 1395년(태조 4년)부터 폐지된 1895년(고종 32년)까지 약 500년 동안 현재 자리를 지켰다. 강원감영은 조선 시대 당시 70여 동 규모를 자랑했지만,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돼 현재는 목조건물 7동만 남아 있다.

강원감영은 주교회의에서 정한 124위 순교자 시복 전대사 지정 순례지다. 하지만 이곳에는 순례자들이 들러 기도할 만한 순교자 현양비나 표석이 따로 없다. 그래서 이곳을 찾으면 남아 있는 건물을 통해 오히려 당시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신앙을 지키던 모습을 풍부하게 상상하게 된다.

 

증언의 음성 끊이지 않던 곳

옷가게가 즐비한 도로를 따라 걸으면 강원감영에 들어서기 전에 포정루를 제일 먼저 만나게 된다. 널따란 기와와 형형색색 단청이 박해시기로 돌아가는 순례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안으로 들어가면 관찰사의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이 있다. 그 앞에서 강원감영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양한모(안드레아)씨를 만났다. 그는 선화당 앞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곳입니다. 당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바로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지요. 요즘 사람들은 형벌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잘 안 될 겁니다. 곤장 1대면 엉덩이 살이 바로 터졌어요. 그런데 순교자분들은 몇십대를 맞고도 절대 배교하지 않았으니….”

최해성은 이 앞마당에서 무려 21차례의 신문과 18차례의 고문을 당했다. 독한 고문으로 다리 뼛조각이 바닥에 떨어지고 창자가 밖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최해성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그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들이 쓰러졌던 자리

감영은 현재 후원 공간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복원이 끝나면 선화당 뒤로 연못 위에 있던 환선정과 봉래각, 관풍각이 들어선다. 조선 시대에는 그 후원 공간 뒤로 옥사가 있었다. 200여 년 전, 우리 신앙 선조들이 갇혔던 곳이다.

김강이와 최 비르지타도 이곳 옥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임금은 절대 배교하지 않던 김강이에게 사형을 내렸다. 하지만 고문 중에 얻은 상처가 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그는 임금의 윤허가 강원에 닿기 전에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1815년 12월 5일 그의 나이 50세였다.

24년 후 최 비르지타는 자신의 발로 옥사에 들어왔다. 조카 최해성이 잡혔다는 소식에 감옥을 찾은 그는 “너도 천주교인이 아니냐?”라는 포졸의 말에 “그렇습니다”라고 당당히 답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그를 3일 안에 굶겨 죽이라는 명이 떨어지자 옥리들은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현재 옥사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감영 뒤편 번화가 부근이다.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로 포장된 거리 근처에 김강이와 최 비르지타가 쓰러진 것이다. 자동차가 무심히 달리는 그 자리에서 마음속으로 순교자들을 위한 화살기도를 바쳤다.

 

맑은 개울에 뿌려진 피

7월 원주 날씨는 폭염주의보가 내릴 만큼 더웠다. 하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바로 원주천 덕분이다.

이날 감영과 순교지를 안내해 준 원주가톨릭센터 정인재(스테파노) 부장은 개봉교 한가운데 서서 말없이 흐르는 원주천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참수는 물 근처에서 치렀다. 최해성 순교자도 감영 밖인 이곳으로 끌려와 칼을 받았을 것”이라며 최해성의 순교 추정지에 대해 설명했다.

최해성은 당시 원주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2리)의 교우촌 회장 역할을 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교우촌 신자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고는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받고도 배교하지 않자 결국 참수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그는 원주천 맑은 물 앞에 기쁘게 순교의 피를 뿌렸다. 그는 문초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전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자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전날 비가 온 뒤여서인지 치악산이 더 크게 보였다. 아마 최해성이 순교하던 그 날에도 치악산은 지금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을까.

 

글·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