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이땅에 믿음과 희망, 사랑을 보낸 역대 교황들

교황과 한국교회
 
이땅에 믿음과 희망, 사랑을 보낸 역대 교황들
 

한국교회는 25년 만에 교황 방문이라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다.

교황 방문이 기쁜 것은 교황이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준비해 온 사랑과 위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직접 접하며 삶의 희망과 믿음, 용기를 얻을 수 있어서다. 한국교회는 이미 1980년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으로 이 기쁨을 맛봤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과 1989년 2번이나 한국 땅을 찾으며, 한국교회를 향한 특별한 사랑을 드러냈다. 비록 한국 땅을 밟진 못했어도 역대 교황들은 선교사 없이 스스로 신앙을 일궈 낸 한국교회를 각별히 여기며,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역대 교황과 한국교회와 관계를 살펴본다.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

 
우리 민족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교황이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중국 옆에 조선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1660년 조선을 중국 남경교구 관할로 지정하고, 선교사들에게 조선에도 선교하기를 권장했다.  

 

 

 

클레멘스 11세(재위 1700~1721)
1702년 조선의 사목권한을 남경교구에서 북경교구로 넘겼다.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이 부분적으로 허용했던 제사를 반대하며 1715년 제사를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했다. 제사 금지는 조선 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다.

 

 

비오 6세(재위 1775~1799)

 

 

1785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교회가 1784년 선교사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며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교회를 돌보고 보호할 임무를 부여했고 조선교회를 위한 교황 축복과 함께 선교 자금(은화 500냥)을 보냈다.

 

 

비오 7세(재위 1800~1823)

1801년 신유박해로 초토화된 조선교회 소식을 듣고도 도움을 주지 못해 괴로워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으며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 조선교회 신자들의 편지를 읽고, 북경교구장에게 가능한 한 빨리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포교성성(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선교지방이나 교회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지역을 다루는 교황청 기구, 현재 명칭은 인류복음화성) 장관을 지냈다. 때문에 조선교회에 관해 잘 알고 있던 그는 교황이 되자마자 조선교회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설정을 반포하며 조선교회를 중국교회에서 분리했다.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신부를 임명, 조선교회 선교 책임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겼다. 또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비오 9세(재위 1846~1878)

조선 제3대 교구장을 지낸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작성하고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옮긴 「기해박해 순교자록」을 읽고 1857년 9월 24일 조선 순교자 82명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다. 한국교회 순교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1866년 12월 조선교구에 서한을 보내 병인박해로 고통받는 신자들을 위로했다.

 

 

성 비오 10세(재위 1903~1914)

 비오 11세(재위 1922~1939)

성 비오 10세 교황은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과 대구대목구로 나눴다.

비오 11세 교황은 1937년 전주지목구를 설정, 최초로 한국인 성직자에게 교구를 맡겼다. 또 평양(1927년)ㆍ연길(1928년)ㆍ광주(1937년)ㆍ춘천(1939년)지목구를 설정하며 한반도에 지역교회 토대를 만들었다. 1925년 7월 5일 순교자 79위를 복자로 선포했고, 다음 해인 1926년 뮈텔 주교를 대주교로 임명, 한국교회 최초의 대주교를 탄생시켰다.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열린 한국교회 첫 공의회에 교황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국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성 요한 23세(재위 1958~1963)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 ‘교계제도’를 설정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선교 교구에서 벗어나 정식 교구 자격을 갖췄고 한국교회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교구 관할 전권을 가지게 됐다. 더불어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4~1965)에 정식으로 초대돼 교황청을 비롯한 각국 교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보편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는 완전한 형태의 지역교회로 인정받게 됐다.

요한 23세는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교황 즉위 전 주프랑스 교황대사를 지낼 당시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 한국 대표단이 외국 대표단과 만날 수 있도록 교섭을 주선하고 한국 대표단을 적극 지원,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

1968년 10월 6일 한국 순교자 24위를 복자로 선포했다. 시복식 강론에서 “유럽 신자들은 한국 순교사를 연구해 한국 가톨릭의 훌륭한 모범을 본받으라”고 말했다. 1969년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 한국교회가 교회 최고 통치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다. 1963년 12월에는 대한민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한복 입은 한국인 신자를 보면 한국말로 “찬미 예수님”이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 교황, 2차례 방한을 통해 한국민에게 가장 친숙한 교황이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교황이다.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사목방문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순교자의 나라, 순교자의 땅”이라고 말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춘 교황의 모습은 한국교회사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명장면이다.

당시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말로 시성식을 주례하며 103위 한국 순교성인을 탄생시켰다. 바티칸 밖에서 시성식이 열린 것도 103위를 한꺼번에 시성한 것도 세계교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교회를 아끼는 교황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한민국이 나치와 공산 정권에서 고통받았던 자신의 조국 폴란드와 비슷하다고 여기며 한국을 특별히 생각했다.

5년 뒤인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 다시 방한한 교황은 남북 화해를 통한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또한 한반도 통일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1996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매년 30만 달러 상당의 구호품을 북한에 지원했을 정도로 남북 화해를 소망했다.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이산가족 문제 등에 꾸준한 관심을 내비쳤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접하고 주일 삼종기도 시간에 바티칸 광장에 모인 전 세계 신자들을 향해 “지금 한반도에서 남북 대화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으며, 화해를 위한 노력이 강화돼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하리라는 희망을 낳고 있다”고 말하며 한반도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요청했다. 2009년 교황청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에겐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