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시복시성 의미와 절차

순교자 흘린 선혈에 후손 땀방울 더해져 복자 탄생했다

 

 

▲ 1925년 79위 시복식이 열린 성 베드로 대성당. 79위 시복에 이어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됐다. 이들 103위 복자는 1984년 서울에서 시성됐다.


16일 하느님의 종(Servus Dei)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가 시복됐다. 1925년 7월 5일에 79위가, 1968년 10월 6일 24위가 시복된 데 이어 46년 만의 시복 소식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 행복을 누리는 순교자들에게는 ‘시복’이 별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는 시복과 시성을 통해 신자들의 성화를 돕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드러낸다. 이날 ‘박해의 심장’이던 육조거리, 현재의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미사를 통해 새로 탄생한 복자들은 지역 교회, 곧 한국 천주교회의 공경을 받게 된다. 이에 시복의 의미와 추진 절차, 한국교회의 시복ㆍ시성사, 새롭게 이뤄지는 한국 교회의 시복 추진과 그 일정을 살핀다.

 



시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선 124위 시복의 의미는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드문 복자들의 자발적 신앙 수용과 역동적 신앙, 적극적 선교의 삶을 본받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쇄신하고, 일상생활에서 복음적 삶을 증언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으로 사는 데도 뜻이 있다.

124위 시복은 또 한국천주교회가 주체가 돼 성사시켰다는 데 도 의미가 있다. 파리외방천주교회가 중심이 돼 추진한 1925년의 79위 시복과 1968년의 24위 시복과 달리 124위 시복은 오롯이 한국교회의 현양과 기도운동, 시복 재판과 시복 청원으로 이뤄졌다. 독자적으로 시복을 추진해본 경험이 부족해 시성성에 절차와 관행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개정된 시복시성절차법에 따라 시복을 진행해야 했기에 시복의 기쁨은 더 컸다.

아울러 조선교회 설립기 순교자들을 위주로 시복이 성사됐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103위 성인은 기해(1839)ㆍ병오(1846)ㆍ병인(1866) 박해 순교자여서 이들의 선조인 초기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복 필요성이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시복은 어떤 절차를 거쳐 이뤄졌나

1984년 103위 시성식이 끝난 후 한국 교회는 교구별로 시복 대상자를 선정, 추진 작업을 시작했다. 전주교구가 이 과정에 앞장섰다. 수원교구도 뒤를 이었다. 그러나 1997년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시복 추진을 통합해서 하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주교회의는 1998년 10월 시복 통합추진 교구 담당자 회의를 소집하면서 시복 추진을 본격화했다. 증거자 최양업 신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자였기에 시복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주교회의’를 청구인으로 시복대상자 선정에 돌입했고, 4년 6개월 만인 2002년 3월이 돼서야 124위가 최종 선정됐으며, 2003년 9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약전이 완성됐다.

2004년 9월엔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추진된다. 이어 시복 심사에 대해 교황청 시성성에서 아무 ‘장애 없음’을 통보받은 뒤에도 7차에 걸친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 회의와 11차에 걸친 예비심사 관여자 회의가 이뤄지던 즈음에 시복재판 법정이 개정됐다. 증언에 대한 심문과 증거자료에 대한 심사, 현장 실사 등 지난했던 한국교회의 시복 준비와 시복 재판은 2009년 5월 124위의 시복문서가 시성성에 제출되면서 1차로 마무리됐다.

이어 그해 9월 시성성에서 시복법정 문서 개봉이 승인된 것을 시작으로 124위 포지시오(Positio, 시성성 통상회의에서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자료) 작성이 이뤄졌고, 시성성 역사위원회와 신학위원회, 시성성 추기경과 주교단 심의를 통과했다. 마침내는 지난 2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124위 시복결정 교령 발표를 허락함으로써 시복이 발표됐고, 그로부터 6개월 만에 교황 주례로 시복이 이뤄졌다.

 

한국교회 시복ㆍ시성, 그 발자취는

한국교회 시복ㆍ시성 추진사는 1838년 말로 올라간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 7일까지 기해박해 순교자들 행적을 박해보고서로 작성한 게 시초다. 이어 1841년 8월 현석문(가롤로, 1799∼1846)이 3년간 노력 끝에 「기해년 치명일기」를 완성하고, 1847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한 프랑스어본 「기해일기」 증보판을 작성해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낸다. 페레올 주교가 작성한 사료가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됨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시복 절차가 시작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사 서설」, 「조선 순교사」등을 완성해 파리로 보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다블뤼 비망기」로 이번 124위 시복에도 중요한 시복자료가 됐다. 시복 조사작업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됐다가 1876년 재개된다. 1879년 예부성성에서 한국 순교자 시복에 아무런 ‘장애 없음’을 선포하고, 1882년 5월부터 1887년 4월까지 하느님의 종 82위에 대한 시복 재판이 이뤄졌다. 1905년에는 ‘기해ㆍ병오박해 시복조사 수속록’이 라틴어로 번역돼 예부성성에 제출됐다. 그러나 82위 중 17위가 순교증거 불충분으로 특별위원회에 회부됐다가 14위의 순교 사실이 확인되면서 79위가 복자로 최종 결정된다. 이들은 시복조사가 시작된 지 무려 78년 만인 1925년에 시복을 받게 된다. 이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도 1968년에 시복되고, 이들 103위 복자가 1984년에 시성됐으며, 시성 30주년인 올해 한국 천주교회 초기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124위 시복이 이뤄지게 됐다.

 

향후 한국교회 시복ㆍ시성 추진 일정은

124위 시복에 앞서 주교회의는 지난해 3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등 214위에 대한 2차 시복 통합추진에 들어간 상태다. 현재 두 시복건에 대한 약전을 집필 중이며, 조만간 시성성에 ‘장애 없음’을 신청하고, 2015년께 시복법정을 개정한다는 목표로 추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124위와 함께 시복되지 못한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여서 최 신부 시복 건은 ‘갈 길이 멀다’. 시성성 역사위원회와 신학위원회 등 심사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하고, 기적적 치유 사실 또한 국내에서 시복재판을 통해 증명돼야 하며, 이를 다시 시성성에 보고한 뒤 재심의를 하고 인정을 받아야 시복이 된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또한 자체적으로 38위 시복 절차를 밟고 있어 이를 다 합치면 현재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은 253위에 이른다. 또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 등의 증거자 시복 추진도 이뤄질 전망이어서 앞으로도 한국 교회의 시복 추진은 계속될 예정이다.

한편 이번에 시복된 124위의 시성 추진 작업은 앞으로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