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복자 124위 열전 <26>유중철·이순이, 조숙·권천례 부부

깊은 성모 신심으로 동정부부 삶 살아

 

 

▲ 유중철 이순이 부부
▲ 조숙 권천례 부부


동정(童貞, Virginity)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성생활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마태 19,10-12), 몸과 마음, 정신을 깨끗이 보존해 봉사 생활을 실천하는 데 참된 뜻이 있다.

 

이같은 삶을 실천했던 여성들을 교회에선 동정녀라고 불렀고, 이중엔 동정부부도 있었다. 유럽 가톨릭교회에선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성 헨리쿠스 2세(973∼1024)와 성 쿠네군다(978∼1033/1039), 폴란드 국왕인 볼레슬라우스 5세와 성 쿠네군다(1234∼1292), 에카르트 폰큐르넨과 스웨덴 성녀 비르지타의 여덟 자녀 중 넷째인 성 가타리나(1332~1381) 등이 꼽힌다.

혼인을 ‘인륜지대사’로 중시했던 조선에서도 동정부부가 탄생한다. 복자 124위 중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조숙(베드로, 1787∼1819)ㆍ권천례(데레사, 1784∼1819) 부부가 동정부부다.

조선에서의 동정부부 탄생은 교회 설립 초부터 동정 성모에 대한 깊은 신심과 동정의 덕에 대한 흠모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 부부는 동정생활에 대한 사회의 비난을 모면하고자 겉으로는 혼인의 양상을 취하되 실제로는 동정으로 정결의 덕을 지키며 살았던 것이다.

이같은 동정생활을 통해 이들 동정부부의 신심은 날로 깊어졌고, 기도와 육신의 고통을 참고 견뎌내는 고신극기(苦身克己), 복음 전파는 이들의 일상이 됐다. 비록 가난했지만 남을 위한 애긍에 더 열심을 보였다. 그야말로 하느님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동정생활 본연의 목적을 실현해 냈던 것이다.

언뜻보면 유중철ㆍ이순이 부부와 조숙ㆍ권천례 부부는 동정부부라는 점 빼고는 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생전에 살았던 곳도 전주와 한양으로, 530리(215㎞)나 떨어져 있었다. 또 유중철ㆍ이순이 부부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면, 조숙ㆍ권천례 부부는 1819년 기묘박해 때 순교했다는 점에서 시차도 커 보인다.

이처럼 살았던 지역도, 시대도 제각각이지만 이들 부부는 사실 적잖은 인연이 있다. 우선 유중철의 부친으로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은 양근(현 양평)에서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문하였다. 1797년 10월 유중철과 함께 동정 서약을 하고 일생을 오누이처럼 살았던 이순이는  권철신ㆍ일신 형제의 여동생의 딸이었다. 또 권천례는 권일신의 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순이와 권천례는 사촌 사이인 셈이다.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던 두 사람은 어떤 형태로건 만났을 가능성이 있고, 동정생활에 대해 서로 생각을 나눴을 가능성이 크다. 양근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와 함께 강원도 외가로 피신해 살아남았던 조숙 또한 권천례를 아내로 맞으며 ‘동정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받고 나서 신앙의 열심을 되살려 평생을 동정부부로 살았다.

동정생활 기간은 유중철ㆍ이순이 부부가 4년, 조숙ㆍ권천례 부부가 15년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4년이든, 15년이든 이들 부부의 동정생활은 교우 부부들의 빛나는 모범이 됐다. 세속을 멀리하며 오롯이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동정부부의 모습에 교우들은 다들 감탄을 감추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순이가 남긴 옥중서간에 나오는 대목은 오늘날까지도 신앙의 열심을 살리는 불꽃으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한(유중철)의 옷 안에서 누이(이순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중에서).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