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24>심아기 바르바라
▲ 심아기 바르바라 |
신약 성경에서 동정의 참뜻과 초자연적 성격을 완전히 보여준 사람은 요한 세례자와 성모 마리아(루카 1,27ㆍ34), 예수 그리스도다.
특히 성모의 동정생활로 예전에는 굴욕적으로 여기던 동정생활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자 부르심(1코린 7,7 ; 마태 19,11-12)이 됐다. 동정생활의 참뜻은 주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그분의 일에 몸바쳐 사는 데 있다.
이에 따라 ‘오직 주님을 섬기고자’(1코린 7,35) 하는 동정생활이 교회 공동체에서 권장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동정생활은 교회 설립기에서부터 비롯됐다. 그 유명한 동정녀 공동체다. 본격적인 수도ㆍ관상생활이야 1888년 7월 22일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가 한국에 진출, 일주일 만에 순교자들 후손 5명이 입회하면서 비롯됐지만 동정녀 공동체는 그보다 100년 가까이 먼저 시작된 셈이다.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동정녀 순교자로 살아간 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03위 성인 가운데서만 정정혜(엘리사벳, 1797∼1839)와 원귀임(마리아, 1819∼1839), 박희순(루치아, 1801∼1839) 등 12위(11.65%)가 동정 순교자였다. 124위 순교자 중에서도 한국 천주교회의 첫 동정녀공동체 회장으로 활동한 윤점혜(아가타, ?∼1801)와 정순매(바르바라, 1777∼1801), 심아기(바르바라, 1783∼1801) 등이 동정녀였다. 이번 호에선 심아기의 삶과 신앙, 순교 행적을 살핀다.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는 오빠 심낙훈(일명 요산)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입교한 뒤로는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특히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한 그는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로는 집안에만 있으면서 모범적으로 교회 법규를 지켜나가는 삶을 살았다. 대ㆍ소재, 곧 금식재와 금육재는 물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수계생활에 전념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죽기까지 순명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처럼 깨끗한 동정생활도 박해로 막을 내린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자 그는 포졸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다렸다. 마침내 포졸들이 들이닥쳐 체포하려하자 그는 포졸들을 막는 어머니를 향해 “너무 슬퍼하지 말고 제가 천주님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의연하게 말한 뒤 박해자들에게 분명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런 다음 동요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서 한양으로 끌려갔다.
포도청에서 그는 배교를 강요당하고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신앙에 항구한 그의 생애는 20일의 문초와 심문, 형벌, 시련 끝에 ‘장살(杖殺)’로 꺾였다. 하지만 순교와 동정이라는 두 영관을 차지한다. 그때가 1801년 4월 초(음력)로, 그의 나이 18세였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는 그가 참수됐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천주교 박해에 대한 조선 조정의 기록을 수집 정리한 「사학징의」에는 장살로 기록돼 있어 124위 약전은 이 기록을 따르고 있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던 오빠는 그러나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 전남 무안으로 유배되는데, 동생에 대한 그의 증언이 「사학징의」권2를 통해 오늘까지 전해온다.
“저는 제 누이 바르바라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했는데, 누이는 끝까지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받아들인 정결의 복음적 권고는 내세의 표지이고, 나뉘지 아니한 마음 안에 더욱 풍성한 풍요의 샘이며, 독신생활의 완전한 정절의 의무를 수반한다’(교회법 제599조). 심아기의 동정생활이 그러했다. 육체적 동정도 지켰지만, 이보다는 마음의 순결, 곧 깨끗한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를 기도와 묵상생활을 통해 닦아나갔다. 동정생활은 사랑의 신비 차원에서 해석돼야 하고, 심아기는 그러한 동정생활을 통해 순교에까지 이르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