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 결정...<25>황일광 시몬
▲ 황일광 시몬. |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은 황일광(시몬, 1757∼1802)이다. 약전엔 ‘천한 신분’ 출신이라고만 기록돼 있지만, 실은 백정이었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천민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이름을 증거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했고, 그는 ‘살아서는 지상 천국’을, ‘죽어서는 내세 천국’을 살아갔다. 부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때로는 124위 시복 건의 제목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서 ‘황일광 시몬과 동료 순교자 123위’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순교 사화는 감동적이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 출신의 황일광이 살아갔던 시대는 18세기 후반이었다. 백정이란 게 본시 가축 도살과 육류 판매, 유기(柳器, 고리) 제조 등에 종사하던 계층이었다. 그런 만큼 제대로 대접을 받고 살았을 리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은 특히 불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아이까지도 반말에 무시하기 일쑤였고, 그런 대접을 당연한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땀과 노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은 그에게 놀라운 지능과 열렬한 마음, 명랑하고 솔직한 성품을 주셨다.
1792년, 홍주를 떠나 홍산으로 이주하던 무렵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우연하게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그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그는 신앙을 접하자마자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했다.
교우들은 물론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애덕으로 감쌌고, 이러한 교우들의 사랑 실천은 양반가에서도 똑같이 이뤄졌다. 그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는 미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그의 발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같은 백정은 얼마나 됐을까? 기록은 일제강점기 중 조선총독부 조사뿐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7538가구에 3만 3712명이 남아 있었다는 1920년대 초 통계가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700만 명쯤 됐으니, 0.19%에 해당한다.
이처럼 차별을 받던 백정들의 해방 운동은 1923년 ‘형평사’(衡平社) 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그 운동이 시작되기 130년 전에 이미 황일광을 통해 백정의 해방 운동이 사실상 이뤄졌던 셈이다.
경상도에서 자유롭게 살던 그는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에 살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 회장의 이웃집으로 이주한다. 이때 만난 인물들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김한빈 (베드로, 1764∼1801) 등이다. 당시에 그의 열심은 양반, 중인, 평민을 막론하고 모든 교우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상경한 그는 자신의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가 팔면서 생계를 꾸렸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누렸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형리들의 매질은 물론 모든 것을 기쁨으로 굳건하게 견뎌냈다. 이윽고 이듬해 1월 30일 고향 홍주로 이송돼 참수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우리 교우들이 이 사람(황일광)을 공경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교황 성하께서 그를 제대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경 말씀이 순교자 황일광을 통해 이뤄졌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그를 귀족들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한자리에 앉히시기 위함이라”(시편 113,7-8).
인간 존엄과 자유, 평등 가치를 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지, 당시 사회 변혁에 얼마나 큰 동인으로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실제 사례, 그게 바로 황일광의 믿음과 순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